
(커미션 전문)
연일 공기가 습윤했다. 테이블에 기대놓은 노트마저 축축해질 기온이었다. 멀거니 창가에 맺힌 물방울을 관조하던 린시는 손을 뻗어 제 드러난 살갗을 훑었다. 수벽보다 낮은 체온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린시는 줄곧 생경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눈꺼풀 뒤에 착상된 풍경은 오랜 시간 변하지 않았다. 빗물이 들이닥치던 창문을 닫은 게 언제인지, 커튼을 걷은 게 언제인지, 의자에서 몸을 떨어뜨린 게 언제인지, 심지어는 끼니를 언제 채웠는지 따위도 가늠이 어려웠다. 감각에 둔해진 몸은 허기조차 잊은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손대고 있던 스케치 노트에는 유리창에 몸을 투신하는 물방울의 흔적이 가득했다. 시선을 틀자 지면을 가로지른 선들이 보였다. 이어 붙어 형체를 완성한 것들, 혹은 갖추다 만 것들. 커튼의 구김살, 목제 테이블의 그림자, 벽걸이 시계, 숫자가 흐린 달력, 침대, 그리고, ……요한. 린시는 턱을 치켜올렸다. 요한이 실제로 침대에 누워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린시는 흘러내린 이불 틈으로 보이는 남자의 등을, 제가 그린 스케치를 번갈아 살폈다. 몰입해 그려낸 스케치에 요한의 파편이 스몄을 것만 같았다. 이따금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림에 요한의 존재를 가둬 넣을 수 있다면. 린시는 그 방법을 시도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헛된 망상이었다. 헛되었으므로 무서웠다. 그런 상상을 가정하는 것이 끔찍했고 가설에 부정할 수 없어 두려웠다. 상념은 고의적으로 이지러진다. 몇 번이고 반복해 살피는 것은 자신의 염원이 요한을 박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한 습관이었다. 몰아쉰 호흡이 불안으로 벅차게 달아올랐을 때, 요한의 어깨가 들썩였다. 기침 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그곳에 실재하고 있었다. 제 터무니없는 상상을 투영한 게 아니라는 안도를 내뱉었다. 손을 뻗어 탁상 달력을 움켜쥐었다. 떠오르는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덧 7월이었다. 이변 없이 장마는 계절을 꿰뚫었고 두 번째 환절기가 찾아들었다. 멋모르고 도래한 여름은 더없이 흐렸다. 무구한 빗줄기를 몰고 온 구름 틈에 갇힌 햇볕이 제 빛을 드리우기까지는 요원해 보였다. 소란스러운 빗줄기가 7월을 훑고 지나갈 무렵, 요한의 체온이 올랐다. 열감기였다. 장마가 앓게 하는 요한의 병은 불치였다. 계절마다 달라붙는 통증을 뒤집어쓴 요한은 침대에 몸을 의탁한 채 옴짝달싹 한 번 하지 않았다.
천천히 지난 날짜를 헤아렸다. 사흘. 손가락 끝이 몇 개의 숫자를 지나쳤다. 셈이 멈췄을 때. 린시는 오늘이 휴일임을 알아차렸다.
연이은 우천은 외출에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오늘 같은 날, 사람들은 대개 집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터였다. 보통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던 린시의 목젖에서 밭은기침이 터졌다. 우스웠다. 현실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주제에 평범을 생각하는 꼴이라니. 마른세수를 하자 닿는 뺨이 차가웠다. 정적은 불시였다. 숨소리가 잦아들고 초침이 삐걱이는 소리만 공간을 메웠다. 여름의 중턱. 오후 세 시를 가까스로 넘어서는 방은 후덥지근했다. 그런데도 홀로, 린시의 체열은 장마의 온도를 닮아가고 있었다.
요한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픈 이유가 그 탓인지. 린시가 요한의 환절기라면. 내가 너를 아프게 하고 있는 거라면. 얇은 옷자락에 가려진 등줄기는 미동 한 번 없었다. 사흘, 일흔두 시간. 요한은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마치 통각에 체념한 것 같았다. 어쩌면 저대로 죽고 싶은 게 아닐까. 불온한 감정이 스쳤다. 물 한 모금 머금지 않은 채 바싹 메말라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기를 원하고 있다면. 일그러진 추상을 멈출 도리가 없었다. 짓씹는 입술이 볼품없이 뜯겼다. 제가 생각해도 허황된 상상이었음에도….
만약 요한이 정말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다면.
린시는 스스로를 숨기는 것에 능했다. 애정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만큼 몸을 웅크릴 줄 알았다. 유년 시절 학습한 것이 그뿐인 탓도 컸다. 사랑받는 대신 폭력을 피하는 법을 배웠다. 끌어안길 때 마주 안는 법 대신 쏟아지는 발길질로부터 인내하는 법을 익혔다. 태고의 기억은 낙인이 됐다. 그 누구도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사랑하는 방법도 사랑받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배우기엔 이미 늦었다고 여겼다. 결핍된 부분을 드러내는 것에 기꺼워하지 못했으니 알아주는 이 역시 없었다. 그때 간신히 손에 쥔 게 요한이었다.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너무도 생소하게 느껴져서, 린시는 종종 제가 붙들어 쥔 요한의 존재가 가짜인 게 아닐지 의심했다. 제가 누군가의 사랑을 간절히 갈급하는 나머지 만들어낸 착각에 불과하거나, 누군가의 의도로 접근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린시를 곧잘 잠식시켰다. 단지 한 사람을 위해 짜여진 인간. 오로지 린시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탄생한 존재… 마치 판도라처럼.
방안은 고요했다. 무거운 침묵을 이제서야 눈치챈 게 기묘할 정도였다. 열기에 들뜬 기침 소리도,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도,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도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의자에 붙이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마저 공간에서 삭제된 듯했다. 린시는 진공의 세계에 서 있었다. 소란이 죄 사라진 방에서, 린시는 요한을 찾았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과 곧은 등선이 들어왔다. 보이지 않는 요한의 얼굴을 그려냈다. 불그스름한 빛을 띠는 하얀 피부, 눈을 감아도 흔적이 엿보이는 쌍꺼풀. 그 연약한 살갗 너머로 어둠을 지키고 있을 동공이 무엇을 투사하고 있을지 알고 싶었다. 요한? 입술을 움직였다. 성음은 귀보다 멀었고, 기다리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린시의 가슴 한 켠 똬리를 틀고 있던 불안감이 부피를 키웠다. 형태를 가지지 못한 감정은 흉곽의 연한 표피 틈을 벌리고 새어 나왔다.
요한은 죽었을까? 바뀌는 계절의 장면마다 요한의 숨결은 얕아져만 갔다. 세계에서 사그라질 것처럼. 린시가 아껴왔던 것들을 떠올렸다. 친구, 동물, 물건. 그것들은 동시에 린시가 잃어왔던 것들이었다. 요한도 그렇게 상실해버린다면. 린시는 침대맡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연인은 여전히 조용했다. 두 걸음. 연인의 죽음을 의심하는 나는 과연 제정신일까. 세 걸음. 내가 두려운 건 널 잃는 것일까, 내가 널 잃고 미치는 것일까. 네 걸음. 이 불치의 병증은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인가. 부유하는 착념들이 어지러웠다. 몸이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린시는 겨우 침대 가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패었다. 병든 애정은 기형적으로 몸을 부풀렸다. 둘은 애당초 평범한 연인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이상적인 애인 시늉을 할 때마다 피로감을 느끼는 것도 지쳤다. 아프게 배워온 방법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낫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요한의 단 한 순간도 불필요한 것에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제 애정만을 건네고 싶었다. 요한에게만 집중하고, 요한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린시는 제 정신을 파고드는 질병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었다. 제 해로운 사랑에 관해 사람들이 미쳤다고 평가한들 상관없었다.
방은 수조 같았다. 린시를 타고 흘러내린 욕심이 넘실거렸다. 린시는 장마의 온도를 닮아가고 있었다. 충동에 휩쓸려 표류한 자신은 흥건히 젖어있는 것만 같았다. 세상과 유리遊離된 수조에 물이 차올랐다. 린시는 시트 위에 다리를 올렸다. 수조를 채운 감정이 침대까지 침수시키는 듯했다. 손을 뻗어 요한의 목덜미를 짚었다. 맥박은 희미했으나 분명했다. 숨을 길게 뱉었다. 그제서야 주변이 인지됐다. 바깥에서 들리는 클랙슨 소리,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 제 심장이 뛰는 소리. 불협의 소음이 제멋대로 뒤섞여 귓가로 미끄러졌다. 린시는 마주한 창가에서 내리쬐는 어둑한 빛으로 하루의 흐름을 유추할 수 있었다. 오후 네 시. 하루를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는 시간. 마치 린시와 요한 같았다. 우린 다시 시작할 수도 없고, 이대로 끝낼 수도 없어.
요한의 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수면은 어느새 벽 끝까지 도달해 있었다. 빠져나가려면 어느 쪽으로 헤엄쳐 나가야 하는지를 알았다. 알고 있음에도 린시는 유영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요한의 등을 끌어안았다. 검은 머리칼에 제 뺨을 문지르고, 뜨거운 체온을 확인했다.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기도했다. 제가 요한에게 환절기 열감기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비록 통증밖에 가져다주지 못할지라도. 네가 같이 죽자고 하면 따라 죽을 수 있으니, 네가 망가진다면 함께 망가질 테니… 부디 혼자 사라지지 말아달라고.
불운한 건 희미한 너인가, 그 불빛이 전부인 나인가. 왜 너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만 같고 나는 빛을 드리워줄 수 없는 사람인 건지. 너는 어쩌자고 희미해서 내가 맹인이 되어 걷는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지. 왜 나는 그 부재를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진 건지. 범람하는 숨을 삼켰다. 눈가가 시큰했다.
다시 빗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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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전문)
1.
핸드폰 알람이 울려댔다. 처음엔 그게 알람 소리인 줄도 몰랐다. 낯선 멜로디가 잠을 방해하는 통에 침대에 굴러다니는 베개를 끌고 와 머리 위를 짓누르는 것으로 소리를 차단하려고 애썼을 뿐이다. 그게 제 핸드폰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챈 건 그로부터 10분가량의 시간이 지나고서였다. 정확히 5분쯤은 다시 잠들기 위해 노력했고, 5분은 시끄러워서 도저히 못 자겠으니 그냥 일어나는 게 낫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구시렁거리는 것도 잠시. 정신이 깨자 음악의 근원은 방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몇 년 만의 알람이었다. 나카지마 료타는 침대 아래로 상체를 기울였다. 바닥에 있는 핸드폰을 주워 알람을 해제했다. 핸드폰을 바꾸고서는 아예 처음 듣는 멜로디였다. 이제까지 알람을 켜둘 일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래 이르게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 시간 맞춰 나갈 일은 더더욱 없었다. 이는 곧 알람 기능을 사용할 일이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어쩌다 알람이 울리게 됐더라. 내가 알람을 맞춘 적 있었던가. 지난 새벽을 되짚었다. 알코올에 절은 기억은 군데군데 끊겨 있었다. 화면 꺼진 액정에 제 얼굴이 비쳤다. 길게 숨을 뱉었다. 잠긴 목이 깔깔했다.
고등학교 졸업.
단어를 상기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힘 풀린 손에서 핸드폰이 추락했다. 침대 모서리와 부딪친 핸드폰은 그대로 튕겨 나가 둔탁한 소음과 함께 카펫 위를 나뒹굴었다. 팔을 뻗어 주변을 휘저었다. 손끝에 닿은 이불을 잡아당겨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살아있을 예정이 아니었는데.
상념엔 착잡함이 서렸다. 분명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사라질 예정이었다. 어떤 이에게도 노출하지 않았으나 오랜 시간 나카지마 료타의 근원이 되었던 계획. 가볍게 살다가 떠나가는 것. 생에 잠깐 머물다 모든 것들과 영영 헤어지는 것. 분명 료타는 이 계획을 이루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죽지 않고 살아있게 되었느냐면.
몸을 옹송그리고 호흡을 억눌렀다. 몇 초, 몇 분.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숨을 들이마시기 무섭게 목젖을 가르고 기침이 튀어나왔다. 눈꼬리에 물이 맺혔다. 이불을 걷어내고 애먼 천장만 쏘아보았다. 이렇게 쉽게 죽을 수 있었다면 미련도 진작 끊어냈을 터다. 해낼 수 없으니 의미 역시 없는 행동이었다. 나카지마는 호흡을 고르며 침대 위에 몸을 펼쳤다. 메마른 시트가 맨살을 긁었다. 홀로 남은 공기가 서늘했다. 문득 탈력감이 찾아들었다.
2.
천장이 환한 빛을 난사하다 검게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칵테일 한 잔을 주문하고 구석진 곳에 서서 주머니를 뒤졌다. 연초 하나를 빼물었다.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데 누군가가 나카지마의 어깨를 건드렸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았으나 볼륨 높은 음악 탓에 주변 소음이 들리질 않았다. 왜요? 입 모양으로 물어보자 상대가 나카지마가 쥐고 있는 라이터를 톡톡 두드렸다. 그냥 라이터만 건넬까 하다가 내미는 대신 뚜껑을 열었다. 상대가 눈치껏 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얀 개비 끝에 불이 붙었다. 뺨이 홀쭉해질 때까지 필터를 빨아들인 상대가 긴 숨을 내쉬었다. 잿빛 연기가 눈앞에 번졌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길었던 머리를 커트친 채 모습을 드러내곤 광장에 앉아 담배 하나를 물던 여성. 그 끝에 불 한 번 붙이겠다고 벌떼처럼 달려드는 남자들. 장면은 금세 막을 내렸다. 나카지마는 묵묵히 라이터를 닫았다. 시선이 맞부딪치고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상대가 팔에 손을 감아왔다. 벽에 붙이고 있던 등을 떨어뜨렸다. 나서는 길에 주문했던 음료가 떠올랐다. 상대와 술 한 잔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시간은 짧았다. 엮인 팔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미련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멀어지는 간판의 네온사인이 잠시간 깜빡이는 것 역시 알 도리가 없었다.
3.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는 습관. 졸업한 후로 생긴 버릇이었다. 액정 위에서 손가락을 두어 번 밀었다. 이름 순서대로 정렬된 목록들 사이에서 다だ행을 찾았다. 무의식은 종종 본능을 앞세웠다. 혀가 되뇌었다. 아이우에오, 카키쿠케코. 카……. 고장 난 회로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멋모르고 공백을 헤맸다. 목적을 찾지 못한 손가락은 끝내 자주 부르던 호칭을 기억했다. 스크롤을 조금 더 내렸다. 다시 히라가나를 읊었다. 마ま행에 이르러서야 움직임이 멈췄다. 멍하니 내려다보던 동공에 초점이 잡혔다. 화면을 끄고 핸드폰을 뒤집었다. 액정 모서리엔 금이 가 있었다. 소파에 기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죽음(그러나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다. 결심에 비해 너무 폭력적인 표현이라 여겼으므로)을 포기한 이후 나카지마는 핸드폰을 바꿨다. 번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기계가 되어버린 옛날 핸드폰은 전원을 끄고 서랍 깊은 곳에 쑤셔 넣었다. 새 핸드폰에는 새 번호가 찍혔다. 한 번 만나고 말 사람부터 여러 번 부대끼는 사람까지 종류는 다양했다. 횟수의 차이만 있을 뿐 깊이는 비등했다. 고교 무렵은 서랍 안에 묻었다. 그 시절이 서랍장 마지막 칸 속에 영영 잠들어 있었으면 했다. 그때 알았던 사람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를. 그것으로도 충분히 나카지마 자신이 존재하던 세계에서 사라진 셈 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몇 년이 지나면 핸드폰을 욱여넣었던 서랍을 잊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혹은 핸드폰을 숨겼다는 사실조차도. 정말이지 쉬운 일이라 여겼다. 인간이라면 무릇 망각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나 스물두 살의 나카지마 료타는 여전히 제 방에 돌아오면 책상 서랍 네 번째 칸에 시선을 주었고, 손잡이를 당겨 여전히 그곳에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렀다. 그럴 때마다 내재한 이성이 속삭였다. 버려야지. 정말 잊기를 바란다면 그저 봉인해서만은 안 되지. 끊고 잘라 네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멀찍이, 떨어뜨려 둬야지. 어딜 미련을 붙들어 쥔 채 잊을 생각을 하느냐고. 그건 무슨 터무니없는 바람이냐고. 기실 모를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알았다. 정말 학창 시절을 놓을 예정이었다면 동창들의 번호가 등록된 핸드폰을 폐기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지울 수 있었다면 어떤 변명도 없이 진작 이 세상에서 사라졌어야만 했다. 쉽게 죽지 못한 탓에 쉽게 버리지도 못했다. 사탕이 가득 담긴 유리병에 손을 넣은 채로 이도저도 못하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멍청한 짓이었다. 사탕을 눌러 쥐고서 한참 기다리기만 했다. 언젠가 손을 뺄 수 있겠지. 언젠가는 욕심을 버릴 수 있겠지. 언젠가. 그 또한 미래를 기약하는 문구였다.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을 가리던 손을 떨어뜨렸다. 오랜 시간 눈꺼풀 위를 짓누르고 있어서인지 빛이 뭉개져 보였다. 천장이 또렷하게 보일 때까지 멀거니 고개를 치켜들었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4.
“요즘 자주 안 오네.”
자주 드나들었다는 연유로 말을 튼 바텐더가 대뜸 말을 꺼냈다. 숫제 의아하단 투였다. 나카지마는 유리잔을 매만졌다. 그랬나? 돌이켜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요즘 바빠서.”
“무슨 일 하는데?”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했다. 마주하는 빈도가 늘면 이게 문제였다. 나카지마 료타라는 개인을 파고들고 싶어 하는 것. 대답해 줄 수 있는 물음이 아니었으므로 난감했다. 상대가 답을 바라고 있는 기색을 내보이면 더더욱. 유리 표면 위로 맺힌 물방울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관망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생각.”
“어떤 생각.”
“어떻게 먹고 살까. 그런 거.”
다들 그러잖아. 나도 똑같지 뭐. 별거 아니라는 투로 덧붙였다.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까. 고민했으니까.
“그래. 피로해 보인다.”
글라스를 거꾸로 매달아 진열하던 바텐더가 나카지마의 눈 밑을 가리켰다.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며칠 통 잠을 못 잔 건 사실이었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아 삼키는 짓거리도 한두 번으로 충분했다. 잠이 오지 않으면 잠이 올 때까지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그 어떤 상념도 무감각한 시간을 침범하지 않았으면 했다.
수없이 많은 충동들이 머릿속을 꿰뚫었다.
죽고 싶다.
조금 더 머물고 싶다.
무료하다면서.
지긋지긋하지도 않아?
이제 와서 늦었지.
정말 늦었다고 생각해? 핑계를 찾고 싶은 건 아니고?
어떤 논리에는 진실이 결여되어 있기도 함을 알았다. 그날은 이른 시간에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파트너 안 찾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남아서. 이번에는 되물어오지 않았다. 고심할 일 없어 다행이었다. 바를 나와 불이 꺼지지 않은 거리를 홀로 거닐었다. 계절이 다 지나가는데도 여태 바람이 쌀쌀했다. 여러 술집들. 호객 행위. 카페. 팔짱을 끼고 걷는 커플. 피어싱 가게. 술 취한 남자. 노점상. 가방을 메고 전화하는 학생. 이곳저곳을 스쳤다. 동공에 담겼던 것들은 금세 지워졌다. 큰길에서 택시를 잡을 생각이었다.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세웠다. 못 박힌 시선이 겨냥하는 표적을 깨달은 직원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요즘 유행하는 패션 안경인데요. 하나 마련하지 않으시겠어요?”
가는 테가 인기예요. 종종 뿔테를 선호하시는 분도 계시구요. 나긋한 음성은 더없이 상냥했으나 귓가엔 제대로 도달하지 못했다. 가만 손을 뻗어 안경테를 만졌다.
안경을 걸친 눈가. 뺨 위로 흘러내리던 머리칼. 목소리에 섞이던 웃음기. 모든 게 선명하게 떠올라 괴롭다고 생각했다. 잊힐 날을 고대했다. 말끔하게 포기할 수 있다면 쉽게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오만이었음을 실감했다. 헛웃음이 터졌다. 이거 하나 드릴까요? 물음에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실례했어요.
택시를 타는 대신 횡단보도를 건넜다. 네가 어떤 안경을 썼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뿔테였던가. 검은 테였나 은색 테였나. 아니면, 무테였던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말 지워진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어쩌면 지금은 안경을 쓰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서웠다. 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게…….
5.
방안은 캄캄했다. 불을 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가장 안쪽에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묻어두었던 고교 시절을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전원 버튼을 눌렸다. 켜지지 않는 건 아닐까. 제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곧 화면에 빛이 들어왔다. 안도 섞인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사탕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유리병 안에 갇혀 있던 손을 꺼내고자 손목을 뒤틀었으나 뜻대로 나오지 않았다. 유리병을 끌어안은 채로 깨달았다. 너무 오래 쥐고 있어서, 너무 오래 붙들고 있어서. 사탕이 녹아 손바닥에 달라붙었음을. 이젠 제가 욕심내지 않아도 욕심이 저를 붙잡고 있음을. 끝끝내 손을 꺼내도 이미 그 손은 더럽혀져 있을 것임을.
전화번호부를 내렸다. 다카기 마이. 이름을 찾았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하나씩 옮겨 눌렀다. 호흡을 골랐다. 어쩐지 눈가가 시큰했다. 전화를 걸었다. 귓가에 핸드폰을 붙였다. 혹시 번호를 바꾼 건 아닐까. 모르는 전화는 받지 않는 게 아닐까.
……
신호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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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블라인드)
쉴드의 휴일이란 사전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른 구석이 있다. 이를테면 한창 쉬고 있는 중이라 한들 갑작스러운 호출에는 무기를 꺼내 들고 나가야 한다든가. 위기 상황이라면 그때가 샤워를 하던 중이라 할지라도, 설령 자다 일어나서라도 욕하며 나갈 테지만 오늘은 아니다. 잠자코 핸드폰을 끄고 현관 앞 테이블에 얹었다. 누구든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이 존재하는 법이다. 내겐 대개 B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랬다.
거실로 들어가자 소파에 B가 앉아 있었다. B의 검은 머리칼 위로 달그림자가 비쳤다. 계절이 덜 풀린 터라 창문은 닫힌 채였다. 유리창 너머로 검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달만 엿보였다. 본래 달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B를 만나기 전의 이야기다.
“B.”
이름을 부르자 노트북 액정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던 B가 얼굴을 들었다. 연보랏빛 눈동자와 마주하자마자 거실을 가로질러 B 옆에 몸을 앉혔다. 왔어요? 하고 묻는 목소리를 음미하는 것 또한 일과의 한 부분이었다.
“기다렸어? 먼저 자도 괜찮았을 텐데.”
늦은 새벽, 어둠이 창궐하는 시간. 물론 쉴드에는 밤낮이 없다. 몇 날 밤을 새우는 것쯤은 익숙할 걸 알았다. 그런데도 걱정이 됐다. 염려를 하고 싶었다. B를 무리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절반. 혹은… 나를 기다려주었으면 하는 마음 반. 인간은 이중적이다. 나 역시 그런 충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얼굴은 보고 잠들고 싶었어요.”
종종 생각한다. 사람은 어디까지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 예전에는 설령 감정이 해일처럼 몰아친대도 헤엄쳐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침몰하길 바라는 사람처럼 쏟아지는 파도에서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B에게서 표류하고 싶다.
“그래도 피곤할 텐데, 허니.”
“괜찮아요.”
오른팔을 B 뒤의 소파에 기댔다. 언제든 끌어안을 수 있는 위치에 머무르고 싶었으므로. 언젠가 B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임무가 끝난 후에 당신이 나에게 가만히 입 맞추는 걸 좋아해요. 평이한 듯하지만 쑥스러운 기색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가볍게 내려앉는 감각이 깃털같이 간지러워 좋아한다며 고백하던 성음. A 생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삶을 살아온 적 있었나. 거칠고 투박한 놈이라는 평가만 지겹도록 들어오지 않았던가. 누군가가 들었으면 비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새삼스레 실감했다. 아무래도 나는 B에게만큼은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은 모양이라고. 천성은 바뀔 수 없다, 그렇게 믿었음에도.
고개를 숙여 B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임무가 끝날 때마다 B에게 입을 맞췄다. 고된 하루가 오늘도 끝났음을, 평온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행동이었다. 실제로 맞닿고 나면 지쳤던 하루가 가라앉는 듯했다. 이것이 습관이 되었으면 했다. 절대 고치고 싶지 않은, 고칠 일 없는 습관이.
“B. 허니가 나에게 했던 말 중에 기억나는 게 꽤 많은데.”
B가 했던 말들을 기억하는 일. 기억하고자 노력해서 외운 게 아니었다. 저절로 새겨졌다고 보는 쪽이 더 합당했다. 키보드에서 손을 떨어뜨린 B가 소파에 등을 붙였다. 팔뚝에 B의 온도가 닿자 자연스럽게 팔을 굽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때, 들어볼래?”
“또 무슨 얘길 하려고 그래요, A.”
적당한 높이의 목소리가 동반하는 작은 웃음소리. 겨울이 옮겨붙어 서늘한 머리칼 위로 뺨을 붙였다.
“그때 그러지 않았나. 우리가 연애하기 전에 말이야. 내가 보여주는 온도 차이를 좋아했다고.”
일전에 B가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일할 때와 평소의 모습이 상반되는 점이 좋았다고. 일을 할 때는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해지는 얼굴이 멋있다고 했었나. 본래도 그런 성정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뒤론 그에 답하기 위해서도 일을 할 때 누구보다 진지하게 굴었다.
“또…… 내 눈동자에 푹 빠졌었다고도 했었지.”
“그건 지금도 그래요.”
가만히 듣던 B가 대답했다. 여전해요, 지금도. 지독히도 똑바른 발음이었다. 오해의 여지를 전혀 느낄 수 없는 명확한 긍정. 말을 들은 순간 일순 폐부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숨이 벅찼다. 이윽고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B는 내 눈을 사랑한다고 했다. 부드러운 헤이즐넛 빛깔이 좋다고 토로했다. B는 이렇듯 내 안에서 유려한 부분을 찾았다. 간지러운 키스, 부드러운 눈동자. 발견된 일면들은 오로지 B에게만 다정히 굴 수 있었다. B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당신 눈을 보는 게 좋아요.”
거울을 볼 때마다 나 자신과 시선을 맞추곤 했다. B가 사랑하는 동공과 맞닥뜨린 채 이따금 상념에 빠졌다. 눈동자가 다른 색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래도 사랑해 주었을지. 곧 쓸모없는 상상은 미끄러트린다. 상상이 무의미하도록 내 눈동자는 여전한 헤이즐넛 색이다. B가 사랑해 마지않는.
“나도 당신 눈동자를 사랑해.”
B의 연보라색 눈을. 라일락을 닮은 향기로운 눈동자를.
그 외에도 B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사랑스러운 구석은 많았다. 달빛을 닮은 새하얀 손가락이 키보드 대신 방아쇠에 걸리는 순간을, 높지도 낮지도 않아 듣기 좋은 미성을, 언제든 쉴드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좋아하는 습성을, 그런데도 여전히 이곳에 머무르는 다정을, 냉정하지만 귀여운 것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풀리는 단단한 입술을.
“그럼 서로 사랑하는 거네요.”
헤이즐넛과 라일락을 생각한다. B에게 바치고 싶은 꽃다발과 커피 한 잔을. 거칠고 날카로운 것들을 매끄럽고 무디게 만들어주는 숨 막히는 애정을.
“…그렇지. 그래서 좋아.”
B를 끌어안았다가 팔에서 힘을 풀었다. 일을 끝내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치챘는지 B의 손이 다가와 느리게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A.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
“조금만 더 있다 잘게. 허니를 좀 더 보고 싶어.”
침대로 향하는 대신 소파에 몸을 눕히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길게 누워 B의 허벅지에 머리를 붙이고 피로를 가라앉혔다. 은은한 달빛이 B의 뺨 위로 음영을 드리웠다. 가까워진 간격을 비집고 B의 체향이 밀려들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읊었다.
“향수를 하나 살까 봐.”
B가 고개를 수그렸다. 얼굴이 마주했다. 향수요? 되묻는 입술이 발음 따라 움직이는 것을 바라봤다.
“어디에선가 광고를 봤어. 향이 좋은 남자가 연애하기 좋은 남자라던.”
텔레비전 광고였을 것이다. 필요한 정보를 빼내기 위해 세계에서 방영하는 모든 뉴스를 틀어놓고 살펴볼 때였다. 한 방송사의 뉴스가 끝나고 곧장 송출되던 화려한 연출이 어쩐지 뇌리에 꽂혔다. 연애하기 좋은 남자. 이 단어가 문득 눈에 띈 것은 연애 중인 탓이리라.
“향수 광고였나 보네요.”
“그랬지. 어떤 브랜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
B의 눈꺼풀이 몇 번 여닫혔다. 모호한 표정이었다. 내가 보고 온 브랜드가 어떤 곳인지를 추측하는 듯했다. 가끔 B에게서 향수 냄새가 풍기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B는 향수에 대해 모르는 편은 아니었다.
“B, 당신이 좋아하는 향으로 고를까?”
“어떤 향을 좋아하는 줄 알고요.”
“무슨 향이 좋은데?”
“싱그러운 잔디 향기.”
향수에 그런 향도 있던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B가 원하니 풀 냄새가 나는 향수를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찾을 수나 있을까, 혹은 그런 향수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 그 어떤 것도 몰랐지만 향수라는 게 워낙 다양하니 하나쯤은 있을 법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사실 없는 건 그리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없다면 조향사를 닦달시켜서라도 만들어내면 됐다.
“허니가 잔디 향을 좋아했어? 그 말 들으니 다음 휴가는 산속으로 캠핑하러 가야겠는걸.”
“산에는 잔디보다 이끼가 더 많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랑 이렇게 앉아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다시금 눈이 맞닿았다. 그치지 않은 달빛이 B의 옆얼굴을 스쳤다. 틀림없이 캠핑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잔디 대신 이끼가 낀 땅 위에 텐트를 치고 못을 박아 고정한 뒤, 넓지 않은 공간에 B와 함께 갇힌다. 얇은 텐트의 벽을 꿰뚫고 달이 녹아내리는 착념에 사로잡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있으면 다 좋지.”
설령 그곳이 지옥이 된다고 할지라도. 이끼 낀 산도, 잔디 깔린 들판도, 무기를 놓쳐서는 안 되는 전쟁터도, 언제 명령이 내려올지 모르는 휴일의 집에서도.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곳에 B가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B의 눈꺼풀 아래로 연보랏빛이 점멸했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내가 눈을 감았다. 밀려든 평온함에 피곤이 쏜살같이 찾아들었다.
“잘 자요, A.”
라일락 향기가 나는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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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아가사
잘 지내고 있으실까 궁금해 편지합니다. 저는 잘 도착했습니다. 끼니는 잘 챙기고 있을는지 염려되는군요. 부디 적당한 영양소가 함유된 식단을 챙겨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날마다 함께해 와서인지 아가사가 없으니 생소합니다. 아침 기도를 끝맺지 못한 것처럼 불온하게 시작한 하루군요. 아가사가 완전한 교회 소속이 아니라 아쉽습니다. 이런 고된 거리를 감내하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지만 이렇게 길게 헤어질 때는 섭섭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게 큰 유감입니다. 혹여 언제든지 소속을 옮길 마음이 들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아가사를 돕는 것은 일도 아니니 말이지요.
중앙청에서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모든 일을 할 필요는 없으니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따뜻한 물로 씻는 것도 피로감을 앗아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니 목욕을 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아가사를 위해 사다둔 입욕제가 찬장 두 번째 칸에 있습니다. 아가사와 어울릴 법한 것들로 골랐습니다. 향을 맡아보시고, 마음에 드는 것을 마음껏 취하세요. 전부 아가사를 위한 것이니. 어떤 게 가장 좋았는지 귀띔해주시면 좋겠군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입욕제가 무엇인지는, 돌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아가사와 잘 어울릴 겁니다.
아직 돌아가기까진 오랜 시간이 남았군요. 시간이 빨리 흐르길 바랄 뿐입니다.
당신의,
이스카리오
그리운 아가사
어느새 회의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일은 잘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드리고 싶군요. 물론 잘 안 될 수는 없겠지요. 아가사를 오래 보지 못하면서까지 온 곳이니 말입니다. 그만큼… 제가 많이 신경 쓰고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니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필체에서 피곤함이 묻어나는 듯싶습니다. 혹시 일을 과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아가사의 성정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만…, 당장 무리한다면 피로가 쌓여 나중에 돕고 싶은 만큼 돕지 못할 수도 있으니, 모쪼록 몸을 생각해주시기를.
저녁입니다. 제법 바쁜 일정이로군요. 모든 회의가 끝난 다음, 이 도시에서 축제가 벌어진다고 합니다. 거리는 축제에 들뜬 목소리들로 소란스럽습니다. 역시 함께 오는 편이 좋았을까요. 아가사가 제법 좋아했을 것 같은 풍경을 저만 보고 있는 것 같아 아쉽군요. 같이 왔다면 시간을 내서 밤하늘을 보며 산책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아가사. 별을 좋아하나요? 예로부터 별은 하늘과 가장 가깝다고들 했습니다. 제가… 그런 별을 욕망해 본 적이 없다고는 못 하겠군요. 바치는 용도로서 말이지요. 아가사에게 별을 선물할 수 있다면 기쁠 겁니다. 그게 설령 새벽별일지라도 말입니다.
별을 보니 당신이 보고 싶은
이스카리오
보고 싶은 아가사
제가 아가사의 별빛이라니 기꺼운 말이군요. 다정한 당신께는 언제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제게 그렇게 베풀어 주시니 이제는 태양까지 욕심내고 싶어질 지경이라는 걸 알고 계실지요. 태양 역시 별일 테니, 욕심내도 괜찮겠습니까? …… 해바라기는 당신이 닮았음에도 당신 아닌 내가 클리티에가 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해를 사랑하다 꽃이 되어버린 그 신도 말이지요. 아가사는 그렇지는 않다고 할까요. 아니라고 속삭여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하루바삐 돌아가고 싶지만 여러 일정에 참여하느라 아직은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것은 오랜만이지요. 물론 아가사의 얼굴은 절대 잊지 못하겠지요. 아가사의 얼굴은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지만, 이렇게 여러 번 떠올리다가 닳을까 봐 걱정이 되는군요. 조금이라도 흠이 남기 전에 돌아갈 테니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다신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당신께 한 번에 다다를 수 있는 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모든 중심이 당신이 있는 곳이 될 수 있다면……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무리는 아닐 겁니다. 이에 대해선 조금의 연구가 더 필요하겠군요. 앞으로는 이렇게까지 멀리 나갈 일이 없을 거라 약속드리겠습니다.
축제는 나쁘지 않게 끝났습니다. 아가사가 생각나 토끼 인형 고리를 하나 사 보았는데, 마음이 차셨으면 하는군요.
당신을 생각하는
이스카리오로부터
아가사께
식사는 여전히 잘 챙기고 계실까요. 이곳에 조금 늦게 도착한 신자께서 안부를 전해주시길, 당신께서 조금 피로한 기색이라고 하더군요. 제대로 주무시고 있는 게 맞습니까? 역시 무리를 하고 계신 게 아닌지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보내시는 하루하루가 부디 당신에게 벅차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거나 오래 헤어져 있어도 어쩔 수 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은 제겐 조금 아쉽게 들리는군요. 저는 항상 아가사가 보고 싶으니 말이지요. 내색하고 싶지는 않지만, 서운한 마음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로군요. 이런 기분을 느껴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럴 땐 보통 어떻게 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물어도 괜찮을지요? 제가 이런 것을 물어볼 수 있는 대상은 아가사 뿐이라, 면구스럽게도 여쭈게 됩니다. 부디 관용해주시기를.
이제 돌아가는 차편에 올랐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가는 길이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가사가 부탁하신 브라우니를 포함한 쿠키 세트는 잘 챙겨두었습니다. 곧 아가사를 만나 마음에 드셨을 입욕제와, 그간의 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군요. 혼자만의 여행을 다녀온 것 같군요. 오랜 시간 못했던 것들을 두고서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저녁 늦게까지 차를 마시며 오래오래 목소리를 섞고 싶은 마음이 깊습니다.
도착하는 날이면 아가사의 돌아오는 길을 맞아드릴 계획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꿈 꾸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곧 재회할, 이스카리오
*새벽별; 루시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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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미션(10) 코스모폴리탄 3361자 (0) | 2019.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