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미션 전문)
연일 공기가 습윤했다. 테이블에 기대놓은 노트마저 축축해질 기온이었다. 멀거니 창가에 맺힌 물방울을 관조하던 린시는 손을 뻗어 제 드러난 살갗을 훑었다. 수벽보다 낮은 체온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린시는 줄곧 생경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눈꺼풀 뒤에 착상된 풍경은 오랜 시간 변하지 않았다. 빗물이 들이닥치던 창문을 닫은 게 언제인지, 커튼을 걷은 게 언제인지, 의자에서 몸을 떨어뜨린 게 언제인지, 심지어는 끼니를 언제 채웠는지 따위도 가늠이 어려웠다. 감각에 둔해진 몸은 허기조차 잊은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손대고 있던 스케치 노트에는 유리창에 몸을 투신하는 물방울의 흔적이 가득했다. 시선을 틀자 지면을 가로지른 선들이 보였다. 이어 붙어 형체를 완성한 것들, 혹은 갖추다 만 것들. 커튼의 구김살, 목제 테이블의 그림자, 벽걸이 시계, 숫자가 흐린 달력, 침대, 그리고, ……요한. 린시는 턱을 치켜올렸다. 요한이 실제로 침대에 누워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린시는 흘러내린 이불 틈으로 보이는 남자의 등을, 제가 그린 스케치를 번갈아 살폈다. 몰입해 그려낸 스케치에 요한의 파편이 스몄을 것만 같았다. 이따금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림에 요한의 존재를 가둬 넣을 수 있다면. 린시는 그 방법을 시도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헛된 망상이었다. 헛되었으므로 무서웠다. 그런 상상을 가정하는 것이 끔찍했고 가설에 부정할 수 없어 두려웠다. 상념은 고의적으로 이지러진다. 몇 번이고 반복해 살피는 것은 자신의 염원이 요한을 박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한 습관이었다. 몰아쉰 호흡이 불안으로 벅차게 달아올랐을 때, 요한의 어깨가 들썩였다. 기침 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그곳에 실재하고 있었다. 제 터무니없는 상상을 투영한 게 아니라는 안도를 내뱉었다. 손을 뻗어 탁상 달력을 움켜쥐었다. 떠오르는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덧 7월이었다. 이변 없이 장마는 계절을 꿰뚫었고 두 번째 환절기가 찾아들었다. 멋모르고 도래한 여름은 더없이 흐렸다. 무구한 빗줄기를 몰고 온 구름 틈에 갇힌 햇볕이 제 빛을 드리우기까지는 요원해 보였다. 소란스러운 빗줄기가 7월을 훑고 지나갈 무렵, 요한의 체온이 올랐다. 열감기였다. 장마가 앓게 하는 요한의 병은 불치였다. 계절마다 달라붙는 통증을 뒤집어쓴 요한은 침대에 몸을 의탁한 채 옴짝달싹 한 번 하지 않았다.
천천히 지난 날짜를 헤아렸다. 사흘. 손가락 끝이 몇 개의 숫자를 지나쳤다. 셈이 멈췄을 때. 린시는 오늘이 휴일임을 알아차렸다.
연이은 우천은 외출에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오늘 같은 날, 사람들은 대개 집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터였다. 보통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던 린시의 목젖에서 밭은기침이 터졌다. 우스웠다. 현실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주제에 평범을 생각하는 꼴이라니. 마른세수를 하자 닿는 뺨이 차가웠다. 정적은 불시였다. 숨소리가 잦아들고 초침이 삐걱이는 소리만 공간을 메웠다. 여름의 중턱. 오후 세 시를 가까스로 넘어서는 방은 후덥지근했다. 그런데도 홀로, 린시의 체열은 장마의 온도를 닮아가고 있었다.
요한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픈 이유가 그 탓인지. 린시가 요한의 환절기라면. 내가 너를 아프게 하고 있는 거라면. 얇은 옷자락에 가려진 등줄기는 미동 한 번 없었다. 사흘, 일흔두 시간. 요한은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마치 통각에 체념한 것 같았다. 어쩌면 저대로 죽고 싶은 게 아닐까. 불온한 감정이 스쳤다. 물 한 모금 머금지 않은 채 바싹 메말라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기를 원하고 있다면. 일그러진 추상을 멈출 도리가 없었다. 짓씹는 입술이 볼품없이 뜯겼다. 제가 생각해도 허황된 상상이었음에도….
만약 요한이 정말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다면.
린시는 스스로를 숨기는 것에 능했다. 애정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만큼 몸을 웅크릴 줄 알았다. 유년 시절 학습한 것이 그뿐인 탓도 컸다. 사랑받는 대신 폭력을 피하는 법을 배웠다. 끌어안길 때 마주 안는 법 대신 쏟아지는 발길질로부터 인내하는 법을 익혔다. 태고의 기억은 낙인이 됐다. 그 누구도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사랑하는 방법도 사랑받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배우기엔 이미 늦었다고 여겼다. 결핍된 부분을 드러내는 것에 기꺼워하지 못했으니 알아주는 이 역시 없었다. 그때 간신히 손에 쥔 게 요한이었다.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너무도 생소하게 느껴져서, 린시는 종종 제가 붙들어 쥔 요한의 존재가 가짜인 게 아닐지 의심했다. 제가 누군가의 사랑을 간절히 갈급하는 나머지 만들어낸 착각에 불과하거나, 누군가의 의도로 접근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린시를 곧잘 잠식시켰다. 단지 한 사람을 위해 짜여진 인간. 오로지 린시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탄생한 존재… 마치 판도라처럼.
방안은 고요했다. 무거운 침묵을 이제서야 눈치챈 게 기묘할 정도였다. 열기에 들뜬 기침 소리도,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도,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도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의자에 붙이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마저 공간에서 삭제된 듯했다. 린시는 진공의 세계에 서 있었다. 소란이 죄 사라진 방에서, 린시는 요한을 찾았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과 곧은 등선이 들어왔다. 보이지 않는 요한의 얼굴을 그려냈다. 불그스름한 빛을 띠는 하얀 피부, 눈을 감아도 흔적이 엿보이는 쌍꺼풀. 그 연약한 살갗 너머로 어둠을 지키고 있을 동공이 무엇을 투사하고 있을지 알고 싶었다. 요한? 입술을 움직였다. 성음은 귀보다 멀었고, 기다리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린시의 가슴 한 켠 똬리를 틀고 있던 불안감이 부피를 키웠다. 형태를 가지지 못한 감정은 흉곽의 연한 표피 틈을 벌리고 새어 나왔다.
요한은 죽었을까? 바뀌는 계절의 장면마다 요한의 숨결은 얕아져만 갔다. 세계에서 사그라질 것처럼. 린시가 아껴왔던 것들을 떠올렸다. 친구, 동물, 물건. 그것들은 동시에 린시가 잃어왔던 것들이었다. 요한도 그렇게 상실해버린다면. 린시는 침대맡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연인은 여전히 조용했다. 두 걸음. 연인의 죽음을 의심하는 나는 과연 제정신일까. 세 걸음. 내가 두려운 건 널 잃는 것일까, 내가 널 잃고 미치는 것일까. 네 걸음. 이 불치의 병증은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인가. 부유하는 착념들이 어지러웠다. 몸이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린시는 겨우 침대 가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패었다. 병든 애정은 기형적으로 몸을 부풀렸다. 둘은 애당초 평범한 연인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이상적인 애인 시늉을 할 때마다 피로감을 느끼는 것도 지쳤다. 아프게 배워온 방법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낫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요한의 단 한 순간도 불필요한 것에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제 애정만을 건네고 싶었다. 요한에게만 집중하고, 요한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린시는 제 정신을 파고드는 질병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었다. 제 해로운 사랑에 관해 사람들이 미쳤다고 평가한들 상관없었다.
방은 수조 같았다. 린시를 타고 흘러내린 욕심이 넘실거렸다. 린시는 장마의 온도를 닮아가고 있었다. 충동에 휩쓸려 표류한 자신은 흥건히 젖어있는 것만 같았다. 세상과 유리遊離된 수조에 물이 차올랐다. 린시는 시트 위에 다리를 올렸다. 수조를 채운 감정이 침대까지 침수시키는 듯했다. 손을 뻗어 요한의 목덜미를 짚었다. 맥박은 희미했으나 분명했다. 숨을 길게 뱉었다. 그제서야 주변이 인지됐다. 바깥에서 들리는 클랙슨 소리,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 제 심장이 뛰는 소리. 불협의 소음이 제멋대로 뒤섞여 귓가로 미끄러졌다. 린시는 마주한 창가에서 내리쬐는 어둑한 빛으로 하루의 흐름을 유추할 수 있었다. 오후 네 시. 하루를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는 시간. 마치 린시와 요한 같았다. 우린 다시 시작할 수도 없고, 이대로 끝낼 수도 없어.
요한의 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수면은 어느새 벽 끝까지 도달해 있었다. 빠져나가려면 어느 쪽으로 헤엄쳐 나가야 하는지를 알았다. 알고 있음에도 린시는 유영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요한의 등을 끌어안았다. 검은 머리칼에 제 뺨을 문지르고, 뜨거운 체온을 확인했다.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기도했다. 제가 요한에게 환절기 열감기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비록 통증밖에 가져다주지 못할지라도. 네가 같이 죽자고 하면 따라 죽을 수 있으니, 네가 망가진다면 함께 망가질 테니… 부디 혼자 사라지지 말아달라고.
불운한 건 희미한 너인가, 그 불빛이 전부인 나인가. 왜 너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만 같고 나는 빛을 드리워줄 수 없는 사람인 건지. 너는 어쩌자고 희미해서 내가 맹인이 되어 걷는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지. 왜 나는 그 부재를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진 건지. 범람하는 숨을 삼켰다. 눈가가 시큰했다.
다시 빗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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