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미션 전문)
“저, 떠나야 돼요.”
앳된 목소리는 자못 단단했다. 히소카는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다가, 이윽고 무릎을 굽혀 어린 소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떠난다고? 소녀의 얼굴이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진 않았다. 다만 납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족의 소녀가 살아온 날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가게 될 마을을 떠날 리 없다. 마을에 우환이 있던가. 여상히 웃는 얼굴 너머로 짧은 상념이 스쳤다. 일족 자체에 관심은 없으나 마을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었다. 고작 몇 초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지나고, 히소카는 손을 내밀어 소녀의 어리고 말랑한 손을 감싸 쥐었다.
“어디 가는데? 목적지가 있을 거 아냐♦”
“옆에 있는 리벨스 마을에요.”
히소카는 제 무릎 위에 팔꿈치를 붙였다. 빈 손바닥 위로 턱을 괴고선 시야에 가득 찬 소녀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소녀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떠난다는 말에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여름 기후를 고려한 탓인지 카디건은 얇았고, 한쪽 어깨를 가로지르는 가방은 아이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작았다.
“아가사, 보통 심부름 가는 건 떠난다고 안 해♠”
“그럼요?”
“그냥 심부름 간다고 하지♣”
의아함을 품은 물음에 대답해주며 히소카는 접었던 무릎을 폈다. 길쭉한 몸이 일어서자, 어린 소녀의 몸은 더 작게 느껴졌다.
“밖에 나가지 말랬더니♠”
“하지만 저도 이제 나가볼 때가 되었는걸요.”
아가사는 올해 열 살이었다. 십 년. 제 손가락 끝을 매달리듯이 잡고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 위로 이보다 더 작았던 손으로 같은 손가락을 꼭 붙들고서 제게 웃어 보이던 갓난아기가 겹쳤다. 잘못 잡으면 손쉽게 망가질 것 같던 그 조그마한 아이가 벌써 제 허리춤에 다다를 정도로 자라났다.
인간은 본래 빨랐다. 금세 자라나고 쉽게 죽었다. 눈앞의 소녀도 분명 인간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이었다. 어렵지 않게 자라나고, 가벼이 죽는. 그 시간을 헤아리면 얼핏 백 년에 가까울까 말까다. 천 년의 시간을 지내온 요괴와, 인간의 백 년. 10분의 1. 아가사는 그 10분의 1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
“히소카 님께서요?”
히소카는 찡긋거리며 웃었다. 위험하니까 말이야. 이어지는 대꾸에 아가사는 천진한 눈동자를 여러 번 끔뻑이더니 입꼬리를 달싹였다. 하지만 그다지 멀지도 않고, 길이 위험하지도 않다고 하셨는데. 누가 그래? 마을 어른들께서 그러셨어요.
“아가사가 다치면 화가 날 거 같아♠”
아가사는 순하지만 다소 맹랑한 구석이 있었다. 이를테면 마을 어른들조차 쉽게 눈을 마주치기 어려워하는 히소카를 말간 낯으로 들여다본다거나. 하기야, 그랬으니 갓난쟁이 아기였을 때부터 기묘한 요괴를 마주하고서도 울음을 터트리는 대신 웃어 보였겠지. 아가사는 기억도 나지 않겠지만 히소카에겐 엊그제 벌어진 일인 것처럼 선명했다.
“히소카 님은 너무 과보호하세요.”
“그래서 다행이지♥”
그 과보호는 오로지 하나를 위한 것이다. 굳이 그것을 알려주지 않은 채 작은 머리통에 손을 붙이자,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커다란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그럼 갈까♦”
/
당연하지만 인간은 천 년 묵은 여우보다 약하다. 그러니 강한 요괴인 히소카보다 인간 쪽이 더 안전에 관해 예민할 수밖에 없다. 히소카가 코웃음 치면서 잡귀들을 가소롭게 여길 즈음, 인간들은 목숨을 걸고 요괴와 사투할 것이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안전하다 공인한 길은 분명 열 살배기 소녀 아가사가 가기에도 무리가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소카가 아가사를 따라온 이유는.
“혼자서도 갈 수 있었는데.”
이어 들리는 말투는 제법 어른스럽다. 히소카는 개의치 않고 아가사의 옆을 걸었다.
“나는 혼자서 못 있거든♣”
“외로우셔서요?”
“응♣ 외로워서♦”
“다른 아이들도 있잖아요.”
“그 애들은 아가사가 아니잖아♣”
한적한 숲길이었지만 둘 사이까지 고요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가사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말을 붙이는 것에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로 묵묵한 성정은 아니었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다름 아닌 히소카였다.
“오늘은 뭘 먹었어?”
“생선 먹었어요.”
“생선 좋아했던가♦”
“싫어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어…, 간식으로 브라우니 먹었어요.”
“맞다, 브라우니 좋아했지♦”
방긋한 뺨이 일순 불그스름해졌다. 좋아하는 것에 들뜬 낯이었다. 아가사가 얌전한 어투로 덧붙였다. 그 마을에서 브라우니를 판대요. 사 오고 싶어요.
“혹시 아가사, 그거 사 먹으려고 심부름에 나선 건가♣”
“그건 아니에요!”
아가사가 얼른 부정을 표했다. 사실 아가사가 그런 사심으로 나설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것도 히소카다. 알면서도 찔러보는 이유는, 색다른 반응을 하는 아가사를 보는 게 즐겁기 때문이었다.
“그 마을에서 브라우니를 판다는 건 나중에 알았는걸요.”
“그리고 또 뭐 파는지 궁금하네♦”
혀가 아릴 정도의 초콜릿 맛을 상기했다.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호불호를 분류하자면 호에는 결코 해당할 수 없는 맛이었다. 하지만 아가사가 건넨다면 히소카는 날카로운 이빨을 물리고 살살 씹은 뒤 혓바늘 아래로 모든 단맛을 녹여내고선, 이윽고는 삼켜내기까지 할 수 있었다. 고작 인간이 건네는 것을. 맞잡은 어린 손목의 유약함을 가늠하던 히소카는 제 예민한 감각을 건드려오는 존재에 짧게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늘 하는 말 있지♠”
따뜻한 밀크티를 떠올리던 아가사가 반문했다. 네? 히소카는 아가사의 머리 위에서 제 손을 휘저었다. 괴 무서운 줄 모르고 겁 없이 근처까지 다가온 귀가 쉽게 튕겨나갔다. 안 따라왔으면 일 날 뻔했군. 히소카는 날카롭게 튀어나왔던 손톱을 안쪽 깊이 밀어 넣고, 그대로 손을 내려 아가사의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색소 옅은 머리카락은 일족의 특성이었으나 흔해 보이지 않았다. 존재로도 진귀하기에.
“세상은 무서우니까, 아가사♠”
“하지만, 무섭지 않아요.”
그런 대답은 지금 나름대로 위험에 처했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닐 테지만. 구태여 현 상황을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아가사가 겁을 집어먹는 모습이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물론 거짓이 분명했다. 다만 뚜렷한 것은, 다른 존재로 인해 아가사가 두려움에 떠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가사가 겁에 질린다면 상대가 히소카이길 바랐다.
인간을 지켜준다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 모를 요괴의 태도에 쉽사리 다가가기 힘든 상황임을 눈치챈 탓인지 잡귀들이 수풀 뒤에 숨어 어슬렁거렸다. 히소카는 결코 관대한 성정이 아니었다. 그 또한 거슬려 죄다 없애버렸다.
“히소카 님이 같이 있어주셔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요.”
이어 들려오는 말에 히소카는 몸을 기울였다. 어깨 아래로 미끄러진 카디건을 고쳐 올려주었다. 그때도 칼날보다 날카로운 손톱은 자취를 감춘 채였다. 아가사는 눈앞의 천 년 묵은 요괴가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여우 요괴가 마을을 어떻게 지켜주었는지, 일족을 공격하는 괴들을 어떻게 사냥해왔는지… 어른들에게 충분히 들어왔겠으나 눈과 귀는 다르다. 히소카는 아가사의 앞에서 본능을 빼어든 적이 없다. 그러니 아가사는 히소카가 강하기 때문에, 히소카가 아가사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가사도 외로운가 봐♥”
젖살이 통통한 뺨이 봉긋해졌다. 아이는 거짓을 소유할 줄 몰랐다. 맞아요. 긍정은 금방 돌아왔다.
“히소카 님이 없으면, 외로울 거예요.”
히소카는 십 년의 시간을 생각했다. 히소카의 목숨이 백 년짜리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아가사의 삶이 십 년으로 흩어지지 않아서. 10분의 1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10분의 9의 삶도 송두리째 삼켜버릴 예정이었으므로. 앞으로도 아가사는 자랄 테고, 또 순식간에 십 년을 보낼 것이다.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짧게 느껴지지는 않으리라. 히소카는 그 시간의 틈 촘촘히 끼어있을 것이다.
“없을 리 없지♦ 늘 옆에 있을 거니까♥”
인간의 죽음이 불가피하더라도. 소녀의 평생을 자신의 찰나와 엮어 함께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저기, 저 마을 같아요.”
시선이 검지 끝을 따랐다. 목적지인 마을이 보였다. 첫 심부름을 거의 해냈다는 게 기쁜지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럼, 갈까♥”
다시 손을 맞잡았다. 아가사의 보폭에 맞춰 발을 옮기며, 이 걸음조차 둘의 삶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하는 수 없지 않겠나. 맞춰주는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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