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미션 전문)
후덥지근한 공기가 뺨을 간지럽히더니 이윽고 열린 창 너머로 초여름의 햇빛이 들이닥쳤다. 소년은 오후쯤 으레 밀려오곤 하는 졸음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몇 겹의 유리창 위로 일어난 채 고전 시를 낭송하는 같은 반 친구의 옆얼굴이 비쳤다. 저 애와 같은 중학교를 나왔던가. 기억은 어렴풋하다. 하지만 나카지마 료타에겐 천성적으로 사람들과 가깝게 굴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시작되면 누구에게든 친근하게 말을 붙이고 떠들 수 있었으며, 쉽게 대화의 중심으로 섞여들곤 했다. 틀림없이 저 애하고도 그런 방식으로 여러 번 말을 주고받았으리라.
나카지마는 턱을 괸 채 얕은 숨을 뱉었다. 해가 길어진 하루는 이제 학교에서 땅거미조차 보는 게 어렵게 되었다. 붉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길목을 걷는 걸 좋아했던 나카지마에겐 아쉬운 일이었다.
“나카지마. 집중해야지.”
하릴 없이 창문 바깥을 바라보던 게 들통 났다. 나카지마는 무료한 얼굴에 금세 머쓱한 미소를 띠었다. 죄송합니다. 빠르게 사과하는 목소리에 교사는 더 이상 힐난을 덧붙이지 않았다. 제게서 시선을 떨어뜨리는 모습에 나카지마 역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리고자 하던 차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문득 시선이 교차했다. 견고한 안경알 너머의 또렷한 눈동자가 맞닿는 순간, 손가락 사이에 느슨하게 걸려 있던 연필이 펼쳐놓은 교과서 위로 툭, 떨어졌다. 심장까지 함께 곤두박질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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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른 생각 많이 하는 것 같더라.”
타카기가 덤덤하게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나카지마의 최선은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이 나만 보시나 봐. 인기인은 괴롭다니까.”
“이번 주만 해도 세 번은 한 소리씩 들었지.”
타카기는 여상한 어조로 대꾸하더니 젓가락을 꺼냈다. 식사를 시작한 타카기에 나카지마 역시 매점에서 사온 빵의 포장지를 뜯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타카기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이윽고 우유를 하나 건넸다.
“요즘 마-쨩 참 다정해. 혹시 말이야, 나한테 할 말 있다던가?”
장난스런 어조에 타카기가 다시 도시락을 향해 시선을 박았다. 티는 내지 않았으나 절로 긴장이 됐다. 뛰는 심장을 감추기 위해 입이 멋대로 움직여대는 걸 들킬 것만 같았다. 제비꽃을 닮은 머리카락이 초여름의 바람을 싣고 나풀거렸다.
“할 말 있는 건 너 같았는데.”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한 대답을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본래 타카기는 선이 확고했다. 쉽게 남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무리 친하게 군다 할지라도 실질적으로 타카기의 안쪽으로 발을 디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분명 나카지마 역시 마찬가지였을 텐데.
“어, …….”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사실 이렇게까지 당황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 것 같으면, 나카지마는 가까이 붙였던 걸음을 다시 뒤로 떼어내곤 했으니까. 타인을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타카기의 벽 안에 위치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뒤로 물리기 힘들었다.
이윽고 웃음소리가 번졌다. 나야 늘 마-쨩한테 할 말 많으니까. 숙련된 솜씨가 단숨에 고요를 가르고, 유쾌한 어투로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미소 안쪽으로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손가락 끝까지 박동이 울렸다. 들킬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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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타카기 마이에 대해서라면 사실 그렇게까지 설명할 게 많지는 않다. 첫 번째 이유라면 최근에 친해진 터라 타카기에 대해서 아는 게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타카기가 자신에 대해서 잦게 말하는 타입이 아니었다는 것이며, 마지막 이유는, 나카지마 료타에게 있어서 타카기 마이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여자애친구.
아니, 안 좋아한다. 나카지마는 속으로 뇌까렸다. 나는 타카기 마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물론. 좋아는 하겠지. 친구니까. 그러니까, 다른 하등의 감정 없이 친구로서만 좋아하는 거였다. 나카지마와 타카기는 명실상부하게 친구 사이였다.
어쨌거나, 왜 나카지마가 타카기에 대한 정의를 고민하게 되었느냐면.
얼마 전 반에서 천문학 체험을 갔다. 별똥별이 떨어질 것이라 예고된 날이었다. 관측소에 들어가 별에 대한 짧은 설명을 듣고, 틀어주는 우주에 대한 비디오를 감상했다. 그리고 해가 지고 밤이 되자 옥상에 올라가 친한 아이들끼리 모여 앉았다. 그때 나카지마의 옆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타카기였다. 타카기는 말수가 적었으나 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아니었다. 좋은 청취자였고, 가끔이지만 농담도 받아주었다. 딱 그 정도. 선이 없는 것처럼 굴지만 누구보다 확고한 선을 지닌 나카지마에게 있어서 타인의 거리를 가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타카기의 선이 그쯤에서 그어진다는 것을 간파한 이후로 나카지마는 타카기의 앞에서 자주 떠들게 되었다. 서로 얄팍한 대화나 나누는, 가벼운 사이였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은 사람의 마음을 참, 어찌할 도리 없이 만들곤 했다.
나카지마는 사실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타고나길 사교성이 좋아 친구들도 많고, 관계도 원만했으나 이따금 걷잡을 수 없이 무료한 감각이 찾아들었다. 친구들도 부모도 간섭할 수 없는 감각. 알싸하게 찾아든 기분을 쫓을 수단도, 그럴 생각도 없었던 나카지마는 자신에게 일시적인 수명을 부여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성인이 되기 전까지만 지내자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이 세상에서 훌쩍 사라져버리는 게 좋겠다고.
별이 쏟아졌다. 나카지마는 하늘로부터 투신하는 별무리들을 넋을 빼놓고 바라보았다. 제 한 몸 아깝지 않아하며 희생하는 전사 같기도 했고, 절정을 향해 도약한 춤을 감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껏 별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눈 한 번 여닫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던 나카지마의 머릿속으로 불현듯 낮에 들었던 말이 스쳤다. 온라인에 별을 파는 홈페이지가 있어요. 별을 사서 서로 선물하기도 하고요.
“마-쨩.”
가까스로 밤하늘로부터 시선을 뗀 나카지마가 옆에 있는 타카기를 불렀다.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타카기가 시선을 내렸다. 별다른 대답은 없었으나 타카기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아차린 나카지마가 가볍게 물었다.
“별 하나 사줄까?”
내 흔적은 남기지 않을 거니까, 그러니까 네게. 별다른 의도가 담긴 말도 아니었거니와 반쯤은 장난이었다. 틀림없이 거절할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타카기가 웃었다. 평소에는 보기 드문 엷은 미소였다. 어? 하고 탄성도 뱉기 전에, 타카기의 손가락 끝이 나카지마의 턱 끝을 가리켰다.
“별 하나. 여기 박혔는데.”
굳이 다른 별이 필요해?
어쩌면 그 말은 타카기로서는 드물게 발휘하는 농담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날따라 유독 나카지마의 감성이 풍부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 문장은 별똥별이 무심코 벌려낸 나카지마의 틈 사이로 침입했다.
다시 별들을 향해 고개를 드는 타카기의 옆에서, 나카지마는 고개를 수그렸다. 어떤 별은 소멸하지만 어떤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남몰래 빛을 잃고 밤하늘에서 지워지고 싶었던 소년이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문득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속절없는 일이었다.
문장이 쏟아진 가슴에 별이 찬란한데 어떻게 빛을 잃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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