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미션 전문, 이름 블라인드)
솔직하게 말하자면, A는 감성에 무딘 편은 아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는 공적인 일을 감정적으로 대처한 적이 더 드물었다. 아니, 거즌 인내하지 않았을까. 공과 사 정도를 분간할 정신머리는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따라서 A는 제가 하는 행위를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했다. 고지식한 청년은 제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가슴 안에 욱여넣을 줄 알았고, 그것을 겉으로 표하지 않기 위해 절제할 줄 알았다. 하지만……. A는 카운터와 제법 떨어져 있는 책장 뒤에서 숨을 삼켰다. 이것은 명백하게, 청년이 자신하던 그의 분별성과는 거리가 아득하게도 먼… 방식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관계의 물리학
적막한 도서관은 설립 취지에 걸맞게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간간히 울렸다. A는 애써 시선을 처박고 있던 책에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가만히 있으면 이상하게 느껴질까 싶어 몇 분 간격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기는 했으나, 사실 머리에 내용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풋풋한 대학생의 머릿속을 가득히 채우는 것은 책속에 적힌 문장이 아니었다. 청년의 생각을 빼곡하게 적어내리는 것은 책 바깥에 존재했다. 머리를 들자마자 생각의 주체가 시야에 들어찼다. 카운터에 머물러 앉은 인물을 위해 자리를 선정한 보람이 있었다.
축약하자면 A는 열람실 안에 자리한 사람 중 유일하게 건물 설립 취지에 맞지 않는 용무를 지닌 채 머무는 셈이었다.
A는 열람실 책장 너머로 상대를 곁눈질했다. 색소 옅은 머리카락에 시선을 맞추다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들키기라도 할까 금방 고개를 수그렸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옆자리에 아무도 앉아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 열에 혼자 자리 잡은 게 아니었다면 분명 누군가는 A의 거센 심장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청년은 조용하게 심호흡을 했다. 책을 힘껏 쥔 손바닥 안에 땀이 고였다. 다시 한번 고개를 들자, 세상 심각하게 서류를 정리 중인 사서의 얼굴이 보였다. 열심히 근무 중인 사람의 옆얼굴에 사심 어린 시선이나 보내다니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건실한 대학생 A가 이렇듯 불온한 마음을 품고 도서관에 매일 같이 출석을 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본래 성실한 성정이기는 했으나, 제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서 할애할 정도로 공부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탓이다. 시험 기간이나, 과제가 많은 날 집중이 필요할 때 한두 번. 딱 그 정도. 청년의 열람실 방문 목적은 확실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시계를 확인하자 어느덧 저녁 다섯 시가 가까웠다. A는 수요일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된 것 또한 얼마 되지 않았다. 청년이 수요일을 좋아하지 않게 된 (차마 싫어한다고까지 표현할 수는 없었다) 까닭은, 수요일은 열람실 이용 시간이 유난히 짧은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다소 우울한 낯으로 책갈피를 꺼냈다. 거의 읽지 않은 것과 별다르지 않기는 했지만 적어도 방학이 끝나기 전까진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가방을 다 챙긴 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의자를 깔끔하게 밀어 넣고 카운터 쪽을 바라보았다. 사서도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이 마주쳤다. 몸이 일순 굳었다. 지금 제가 제대로 걷고 있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오늘 공부 잘하셨어요?”
사서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다정한 미소였다. A는 문득 그 미소가 저에게만 상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다. 하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청년이 사서에게 반한 이유는 그런 박애적인 다정함이었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모든 길고양이에게, 혹은 다른 생명에게까지 무분별하게 쏟아질 것 같은 그 속절없는 상냥함.
청년은 뻣뻣해진 몸을 멈춰 세우는 것으로 긴장에 대한 타협을 봤다.
“……그럭저럭은, …….”
사실 공부 같은 건 하나도 안 했지만 솔직하게 대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A는 거짓말을 능숙하게 입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요령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제가 생각해도 어색한 답변을 하고 나니 후회가 일었다. 그냥 잘했다고 대답할걸.
사서는 여전히 상냥한 낯이었다. 이제 퇴실하세요? 도와드릴까요? 묻는 것에 A는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도서관 회원증을 내밀었다. 사서가 책상 위의 바코드 기를 들어 회원증에 가져다 댔다. 짧은 기계음과 함께 A가 이용한 칸이 반납됐다.
“같이 나가실래요?”
사서의 제안에 A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것이 상대를 조금 더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기도 하다면. 청년은 머뭇거리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열람실 바깥을 빠져나와 도서관 계단을 내려갔다. 은발의 사서는 퇴근이 즐거운 듯했다. 사서는 오늘 저녁 메뉴에 관해 물었고, 또다시 대답할 순번이 돌아온 청년은 가까스로 어제 먹다 남은 것을 다 먹어야 한다는 답변을 건넬 수 있었다. 사서의 저녁 식단은 파스타라고 했다. 집에 가는 길에는 쿠키와 젤리 등의 간식을 사갈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사서가 단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추론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늘 같은 곳에 앉아서 공부하시죠?”
사서의 입맛에 대해 골몰하던 A는 갑작스럽게 날아오는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다.
“항상 같은 곳에 앉아서 공부하시는 이유라도 있나요?”
아, 혹시 무례한 질문이었다면 죄송해요. 그저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대답하기 불편하시다면 넘겨주세요. 사서가 부드러운 말투로 덧붙였으나 그 말들은 A의 달팽이관에 채 도달하지 못했다. 그때쯤 청년의 머릿속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것은 어떻게 대답해야 제 이상 행위를 들키지 않을지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A는 죽었다 깨어나도 당신 얼굴을 보기 위해 늘 그 자리에 앉았다는 솔직한 대답을 지껄일 수 없었다.
가련한 대학생은 과도한 긴장에 불협한 소음을 일으키는 뇌를 억지로 돌렸다. 무심하게도 마땅한 것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구원이 된 것은 뜻밖에도 난처한 상황을 일으켰던 상대였다.
“거기서 공부가 잘되는 건가요?”
사서의 순수한 물음에 A는 일단 고개부터 주억거렸다. 거짓을 내뱉으려니 혀가 입안에 달라붙은 듯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거기서, 거기서 잘 돼서.”
첨언하기엔 더 이상 뭍으로 나간 인어공주라도 된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서툰 거짓의 폐해였다. A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소질 없는 거짓말을 더 뱉는 것보단 차라리 묵언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알았다. 사서가 웃었다. 징크스 같은 게 있나 봐요. 진솔한 청년은 고해성사 대신 그냥 머리나 끄덕이기로 했다.
/
목요일 아침, A는 열람실 대출 기계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른 오전부터 당도한 비극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방학에도 부지런한 대학생은 자신보다 이르게 온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우선 옆 좌석을 대출했다. 짝사랑에 번민하는 청년의 손가락이 떨렸다. 늘 앉던 자리가 이미 대출되어 있다는 것은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다. 비통한 기분으로 영수증을 받아 2층 열람실로 향했다. 발걸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A는 유리문 손잡이를 쥔 채 멈춰 섰다. 제가 늘 앉던 그 자리에, 은발의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먼저 빌려 간 그 칸은 당연하게도 사람이 한 명 앉아있었다. 칸막이 때문에 모습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으나, 사서는 상대 쪽으로 허리까지 살짝 숙여가며 말을 붙이고 있는 듯했다. 도대체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A는 그때서야 제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사서가 몸을 돌렸다. 오늘도 여전히, 미소 띤 낯이었다. 다정한 얼굴과 마주치자 순간 넋을 잃었다. 유리문 바깥에 멀거니 서 있는 A를 발견한 사서가 가볍게 손짓했다. 사서의 손끝을 따라가 보니, 늘 앉던 그 자리가 비어있었다. 이어 힘을 가하지도 않았는데 문이 밀렸다. 손잡이를 붙들고 있던 몸이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사서가 문을 당긴 것이다.
“자리 저기 맞죠?”
사서 쪽으로 몸이 밀렸다는 생각도 잠시, 사서가 웃음기 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기서 해야 잘 되신다면서요. 그래서.”
그래서, A를 위해 사서가 먼저 자리를 빌려간 사람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다는 뜻이었다. 특별. 저도 모르게 속으로 단어를 읊었다. A는 눈꺼풀만 여닫았다. 일순 길고양이를 쓰다듬던 사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건네는 미소와 똑같은 감정을 품은 채 고양이를 바라보던 그날의 사서를. 그날부터 A는 같은 자리의 열람실에 앉아서……. 목젖이 간지럽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니,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오늘 많이 더워요? 얼굴 달아오른 거 같은데.”
사서가 당긴 것이 문이 아니라 A, 자신인 것 같았다.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 하였다
첫사랑이었다.
김인육, 사랑의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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